[다시쓰는6·25전쟁] 북한군의 9월 공세
북한군 최후 공세로 절체절명의 위기적군 전 전선서 동시 공격 감행… 전황 악화 맥아더, 위기속에서도 냉정하게 반격 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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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9월 북한군은 낙동강에서 마지막 최후 공세를 감행했다. 사진은 부족한 전력을 메우기 위해 남한 지역에서 강제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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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 전선에서 미 24사단을 방문한 워커(오른쪽) 8군사령관이 처치 24사단장과 작전을 협의하고 있다. 뚝심 있는 명장이 |
대구 북방에서도 북한군 1개 사단이 영천 방면으로 이동하면서 대구에 지향되었던 적의 공세는 둔화됐다. 영덕과 포항에서도 전투는 계속됐으나 방어선 자체가 붕괴될 정도의 위기는 아니었다. 여전히 북한군의 움직임이 활발했지만 전체적으로 북한군의 공격 기세는 눈에 띄게 약화됐다.
결국 뜨거웠던 8월의 전투에서 승리한 것은 국군과 미군이었다. 8월 15일까지 전쟁을 끝내겠다는 북한의 선전은 공수표가 됐다. 미군 증원 병력이 연달아 한국에 도착하면서 이제 국군과 미군을 합친 지상군 병력 수는 북한군 2배에 육박했다.
맥아더 장군을 비롯한 미군과 유엔군 총지휘부는 오히려 9월 중순으로 예정된 상륙작전 준비에 더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8월 22일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할 미 해병1사단 병력이 일본에 모두 도착했다. 다음날 도쿄에서 열린 미군 고위지휘관회의에서 인천 상륙작전이 최종 결정됐다.
피아 전력의 차이를 냉정하게 고려했을 때 북한군 입장에서는 방어태세로 전환하거나 그도 아니라면 유사시에 대비한 철수 계획을 마련해야 할 상황이었다. 일부 미군 장교들도 북한군이 과연 방어태세로 전환할 것인지 여부에 관심을 가질 정도로 약간씩 여유를 갖게 됐다.
◆ 예상 못한 대공세
미군 일각에서 ‘전쟁 이래 지속됐던 북한군의 전면 공세는 이제 곧 끝날 것’이란 기대감을 살짝 품을 무렵 뜻밖의 상황이 돌출됐다. 낙동강 서부전선과 서남부 전선에서 북한군의 이상한 움직임이 노출된 것. 미8군 정보처는 8월 28일 경남 합천 방면에 2개 사단과 20대의 전차가 집결된 것을 포착했다. 이들 북한군이 경남 영산 방면을 방어하고 있는 미 2사단을 공격할 수 있다는 것이 미군 정보 당국의 판단이었다.
미 25사단 정면의 남강에서는 북한군이 수중교량을 건설하고 있었다. 수중교량이란 제2차 세계대전 소련군식의 도하 수단으로 얕은 물 속 바닥에 도로 형태의 구조물을 만들어 차량과 병력이 도섭할 수 있도록 만든 구조물이었다. 미 5공군은 도하를 시도하는 북한군의 움직임이 포착될 때마다 공격을 가했지만, 주로 야간을 이용하는 북한군의 도하 준비 작업과 도하 시도를 완전히 차단할 수는 없었다.
미군 내에서 “북한군이 국지적으로는 모종의 공세를 감행할 수도 있겠다”는 우려와 “북한군의 공세 능력은 사실상 소진됐다”는 상반된 평가가 엇갈리는 상황에서 돌연 북한군의 전면 공세가 다시 시작됐다.
8월 31일 한밤중 함안에 주둔하고 있던 미 25사단은 북한군 6사단의 격렬한 공격을 받았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미 25사단의 진지는 차례로 무너져 갔다. 고지에 배치돼 있던 미 25사단 24연대 3대대는 9월 1일 새벽 2시쯤 함안 시내가 불바다에 휩싸이는 것을 보고 사색이 됐다. 북한 6사단의 2개 연대에 의해 경남 함안이 함락된 것이다.
같은 시각, 미 2사단이 방어하는 창녕ㆍ영산방면에도 북한군 2ㆍ9사단이 도하 공격을 가했다. 소형 보트와 수중교량 등 생각할 수 있는 온갖 도하 방법으로 대병력을 도하시킨 북한군은 미 2사단 예하 연대의 진지 틈새를 파고들어 각개 격파를 시도했다. 9월 1일 아침이 됐을 때 미 2사단장 카이저 장군은 고립된 사단 예하 부대를 2개 그룹으로 나눠 별도의 지휘관을 지명해서 작전을 해야 할 만큼 전황이 악화됐다.
9월 1일 새벽 워커 장군은 급변한 전황에 충격을 받았다. 혹 북한군이 다시 공세를 재개할지 모른다는 예상은 했었지만 이 정도로 대규모 공세를 펼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8월 31일 밤부터 재개된 북한군의 공세 강도는 8월 공세를 능가하는 수준이었다. 이른바 9월 공세의 시작이었다.
◆ 워커의 대응
워커 미 8군사령관은 항상 그래왔듯이 예비대를 어디에 투입할 것인지를 고민했다. 각 지역에서 방어를 하는 것은 예하 사단의 몫이었다. 워커 장군의 역할은 북한군의 공격이 집중된 지점이나, 아군 방어망이 완전히 뚫릴 가능성이 높은 위험지역을 파악해서, 자신이 보유한 예비대를 투입하는 것이었다.
전황을 파악하기 위해 미 25사단과 2사단을 직접 방문한 워커 장군은 보고받던 것보다 훨씬 나쁜 전황에 할 말을 잃었다. 각급 부대의 주둔지 사이에는 북한군이 침투해 중대ㆍ대대ㆍ연대급 미군 부대 상당수가 북한군에 포위당해 고립됐고, 통신마저 두절됐다. 미 5공군과 7함대 항공모함이 위기에 빠진 미 육군을 구하기 위해 근접항공지원으로 지원해 줬지만 전세는 좀처럼 호전되지 않았다.
고민하던 워커 장군은 경남 영산 방면이 가장 위급하다고 판단하고, 이 지역에 미 해병1여단을 투입하기로 결심했다. 미 해병1여단은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되기 위해 후방에 빠져 있었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9월 2일 오전 워커 장군은 맥아더 원수가 사령관으로 있는 미 극동군사령부의 부참모장 학키 소장에게 전화를 걸어 미 해병1여단 투입을 공식 요청했다.
워커 장군은 인천상륙작전에 대한 대비 때문에 자신의 요청이 거절당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의외로 학키 소장은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사전에 맥아더 원수가 워커 장군이 요청할 경우 언제든지 해병대를 지원하라고 지시했다”는 것이 학키 소장의 전언이다. 맥아더는 전체 전황을 정확하게 읽고 있었던 것이다.
워커 장군은 혹시 자신의 요청이 거절될 경우에 대비해 또 다른 예비대였던 미 24사단에도 밀양 서남쪽으로 이동해 역습작전에 투입할 준비를 갖출 것을 명령했다. 이때 8군 차원의 유일한 예비대였던 미 27연대 3대대를 25사단장 킨 소장이 임의로 사용해 버려 워커 장군은 전황이 더 악화될 경우 더 이상 사용할 카드도 남아 있지 않았다. 워커 장군은 9월 2일 마산과 영산, 창녕 등 경남 서부지역과 서남부 지역에 집중된 북한군의 압력을 분산시키기 위해 대구 북방의 미 1기병사단에도 역습을 명령했다.
◆ 절정의 위기
하지만 바로 그날 밤, 대구 북방에서도 북한군의 공세가 다시 시작됐다. 역습을 준비하던 미 1기병사단 7연대는 오히려 북한군 3사단의 포위 기동으로 위기에 빠졌다. 북한군 13사단과 1사단도 대대적인 공격을 가해 왔다. 경북 영천에서도 적 8ㆍ15사단, 안강ㆍ기계 쪽에서도 적 12사단이 공세를 시작했다. 전체 전선에서 북한군의 공세가 시작된 것이다.
위기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인천상륙작전을 준비하던 맥아더 원수의 참모들과 예하 부대 지휘관들은 미 해병1여단을 낙동강 전선에 다시 투입하는 것에 강력하게 반발했기 때문이다.
미 해병1여단은 3일부터 경남 영산에 투입돼 북한 9사단을 밀어붙이고 있었지만, 상당수 극동군의 참모들과 예하부대 지휘관들은 맥아더에게 해병대의 원대복귀를 강력하게 요청하고 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안강ㆍ기계 쪽에서 북한군 12사단이 전선을 돌파하면서 또 다른 위기가 찾아왔다.
워커 장군은 밀양 인근에 대기시키고 있던 미 24사단을 경주로 이동시켜 안강ㆍ기계 방면의 위기를 수습하려 했지만, 도쿄의 극동군사령부에서는 “해병1여단을 원대 복귀시켜 인천상륙작전에 대비하라”는 청천병력 같은 지시를 내려 보냈다. 해병1여단이 복귀하면 미 24사단을 경남 영산에 투입하는 수밖에 없었지만, 7월 이후 오랜 격전으로 이미 전력이 약화된 미 24사단이 영산의 위기를 수습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설상가상으로 대구 북방의 미 1기병사단 진지도 무너지고 있었다.
미 8군에서는 이제 워커 라인을 포기할 것인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대구의 육군본부도 부산 동래로 이동했고, 미 8군사령부의 이전 가능성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약삭빠른 우리나라 일부 민간인들은 이제 대한민국은 가망이 없다고 생각하고, 밀항선을 타고 일본으로 도주하는 자까지 나타나기 시작했다. 장개석의 국민당 정부처럼 대한민국도 결국 공산세력에 무릎을 꿇을 것이란 재수 없고 불길한 예측이 군은 물론 민간에까지 넘실거렸다. 북한군이 1950년 6월 25일 남침을 시작한 이래 가장 절체절명의 최악의 위기였다.
* 자료제공 : 국방일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