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쓰는6·25전쟁] 대구 북방의 격전

김병륜 기자

  • 입력: 2010.08.03 22:35:07 / 수정: 2010.08.03 22:3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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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 일대 전선 교착 … 혼전에서 격전으로

푸른색 알파벳 숫자가 국군과 미군 사단, 붉은색 알파벳 숫자가 북한 사단을 의미한다. 로마자
로 표시된 숫자는 군단이다. 8월 4일 낙동강 방어선이 형성되고, 8월13일 무렵 대구부터 포항
북방의 산악지대에 새로운 방어선이 형성됐음을 보여준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제공

 미 8군 사령관 워커 장군의 결단으로 마산 위기는 수습됐지만, 사실은 그때부터가 시작이었다. 1950년 8월부터 낙동강 주변 일대로 전선이 점차 고정되면서 전투의 강도는 극단적으로 높아졌다. 6월 25일 개전 이후 계속되던 혼전(混戰) 양상은 이제 열전(熱戰)으로 표변해, 산을 녹이고 강을 마르게 하는 수준의 격전이 벌어졌다.


 ◆ 전선의 최후 조정 

 낙동강전투 준비단계에서 워커 미8군사령관은 정일권 육군 총참모장에게 “가장 신뢰할 수 있는 국군부대를 왜관 북쪽에 배치해 달라”고 요청했다. 워커 장군이 이런 부탁을 한 이유는 왜관 북쪽이 미군이 담당하는 낙동강 서부 지역과 국군이 담당하는 낙동강 북부 지역을 연결하는 중요한 중간 고리였기 때문이다. 만약 이 지역의 국군이 무너지면 미군마저 덩달아 위험해질 수 있었다. 워커 장군의 부탁을 받은 정 총참모장은 백선엽 장군이 지휘하는 국군1사단을 추천했다. 이에 따라 국군1사단이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왜관과 대구 북쪽 지역에 대한 방어를 맡게 됐지만 문제는 너무도 넓은 방어정면 이었다.

 낙동강 방어선에서 국군1사단이 맡은 방어 정면은 폭이 42㎞로 다른 국군 방어 정면의 2배가 넘었다. 장비나 훈련 수준, 병력 규모면에서 더 우월했던 미 육군 사단의 방어 정면에 비해서도 더 넓었다.

 낙동강 방어선의 원래 취지는 하천 장애물을 최대한 활용해 도하를 방해하는 것이었지만, 국군1사단은 제대로 된 하천 방어를 수행할 여건이 못 됐던 것이다. 이런 상황 탓에 국군1사단은 낙동강 강안에서 결전을 시도하기보다 적에게 최대한 타격을 주면서 융통성 있게 작전을 수행했다.

 특히 백선엽 1사단장은 이 같은 사정을 고려해 낙동강 강안이 아니라 대구 북방의 산악지대에 최후 방어전을 펴기로 결심했다. 백 사단장의 결심은 상부로 보고됐다. 마침 육군본부도 국군의 방어정면이 지나치게 넓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이에 따라 정 총참모장이 지휘하는 육본은 8월 11일 국군의 전선을 낙동강 강안이 아니라 왜관~수암산~유학산~군위~보현산으로 연결하는 후방으로 축소시킬 것을 결정했다. 이에 따라 1사단은 낙동강 강안에서 더 후방인 대구 북방 수암산~유학산 일대를 연결하는 선을 최후 방어선으로 정하고 8월 13일 무렵 계획된 방어선에 병력을 배치했다.


 ◆ 절정의 위기

 그때부터 국군1사단이 방어하는 대구 북방에서 일대 격전이 벌어졌다. 특히 북한군 3ㆍ13ㆍ15사단 등 3개 사단이 다부동을 중심으로 대구 북방 산악지대로 공격해 오면서 상상을 초월하는 난타전이 벌어졌다.

 1사단의 방어전은 시작부터 어려움이 많았다. 진지 전환 과정에서 1사단 일부 부대가 후방으로 집결한 후 다시 유학산 등 주저항선으로 투입될 때 북한군이 먼저 유학산 등 주요 고지를 점령해 버린 것이 문제였다. 이에 따라 1사단은 사전에 주저항선으로 선정됐던 주요 고지군을 방어하면서, 북한군이 선점해 버린 유학산 등지를 탈환해야 하는 이중의 임무를 떠맡게 됐다.

 328고지ㆍ유학산 등에서 서로 뺏고 뺏기는 격전이 8월 중순 내내 반복됐다. 대구 북방에서 북한군 공세가 심상치 않다고 판단한 미군은 8월 16일 B-29 폭격기 98대를 동원해 낙동강 건너 왜관 일대에 융단 폭격을 실시했다. 대구로 공격해 오는 북한군의 압력을 줄이기 위한 조치였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27연대 등 예비대가 다부동으로 투입됐다.

 8월 18일 새벽에 대구 북방 가산 방면에서 침투한 일부의 북한군이 대구역 부근으로 박격포 사격을 가했을 때는 위기가 절정에 달했다. 대구에 있던 정부는 부산으로 이동했고, 시민들도 술렁이기 시작했다. 국군1사단은 미27연대와 함께 위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격전을 치렀다.

 수암산ㆍ유학산에서 밀고 밀리는 쟁탈전이 계속되면서 전선은 간신히 지탱됐으나 상황은 여전히 불확실했다. 미23연대와 국군8사단 10연대도 대구 북방으로 추가 투입됐다. 사실상 사단급 전력이 추가될 만큼 대구 북방의 전투 양상은 격렬했던 것이다.

 위기의 순간이 많았으나 국군 1사단장인 백선엽 장군은 그때마다 지휘력을 발휘, 결국 전선을 지탱하는 데 성공했다. 8월 20일 마침내 북한군의 공격이 다소 약해졌다. 대구 북방의 방어선을 뚫는 것이 쉽지 않다고 판단한 때문인지 유학산 일대에 포진해 있던 북한 15사단이 돌연 영천 방면으로 이동한 것이다.

 북한군 3사단과 13사단이 대구 북방에 여전히 남아 공세를 지속했지만 8월 중순 때만큼 기세를 올리지는 못했다. 8월 22일 국군 1사단이 유학산을 탈환하고, 북한군 13사단 포병연대장이 국군에 귀순한 것은 다부동전투의 무게 추가 아군 쪽으로 기울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이었다.

 
 ◆ 한국의 베르덩

 8월 말 미군 사단이 다부동에 투입되고, 1사단은 신녕 지역으로 이동하면서 다부동전투는 국군의 승리로 마무리됐다. 다부동전투 기간 중 국군1사단에서는 매일 평균 600∼700명의 인원 손실이 발생해 대구 시내에서 급하게 모집한 신병과 학도병으로 전력을 보충했다. 중대장이나 소대장이 부하들의 이름은 물론이고 얼굴조차 제대로 익히지 못한 상태에서 전투에 돌입할 정도로 당시 전선 상황은 처절했다. 미군들의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수십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던 베르덩 전투에 빗대 다부동을 한국의 베르덩이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8월 한 달 동안 국군과 유엔군은 다부동 일대에서 1만여 명이 전사했다. 인민군도 3만여 명이 전사해 다부동 일대는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해 코를 잡지 않고는 다닐 수 없었다는 증언이 남아 있을 지경이었다. 심지어 8월 말 국군 1사단 대신 투입된 미 1기병사단이 다부동 진지를 인수하는 과정에서 냄새가 얼마나 진동했던지 미군 측 일부 장병들은 “시체를 치워주지 않으면 진지를 인수하지 않겠다”고 버틸 정도였다. 그런 처절한 격전과 희생 끝에 국군 1사단과 미군 증원부대는 대구 사수에 성공한 것이다. 



 ◆ 낙동강 방어전의 기본 개념

 1950년 8월 중순부터 전투 양상은 지연전이 아니라 고수 방어 위주의 전투로 바뀌었다. 공간을 내주고 시간을 버는 싸움이 아니라 제자리에서 버티든가, 아니면 죽는 식의 처절하고 살벌한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유엔군의 지상군 지휘관으로 국군과 미군을 사실상 지휘하던 미8군 사령관 워커 장군은 이미 7월 하순부터 “버티든가 아니면 죽든가”(stand or die)라며 현 전선 고수를 외쳤지만, 그 같은 워커 장군의 의지가 현실에서 나타난 것은 바로 8월 중순부터였다.

 북한도 8월 15일까지 전쟁을 끝낸다는 목표를 선전하고 있었기 때문에 8월에 접어들면서 통상적인 수준을 넘어서는 광신적인 공격을 가해 왔다. 중장비를 탑재할 수도 없는 작은 목선으로 도하작전을 감행하는가 하면, 인해전술을 연상케 하는 보병의 제파식 연속 돌격을 감행하는 등 북한군 공격 양상도 격렬하게 바뀌었다.

 국군과 유엔군의 처지에서 전선 상황은 암담하기 짝이 없었다. 국군 부대의 경우 당시 대구 북방에 1사단, 경산과 영천에 6사단과 8사단, 안강과 기계에 수도사단, 포항에 3사단이 각각 배치돼 있었다. 미군도 별다를 것이 없어서 대구 서쪽에 1기병사단, 현풍과 창령에 미24사단, 마산에 미25사단 등 단 3개 사단만 배치돼 있었다.

 사실상 대구와 부산을 중심으로 한 영남 중남부지역에만 간신히 발을 걸치고 있던 상황이었던 만큼 단 한 차례만 방어선이 뚫려도 대한민국의 국운 자체가 위태로울 지경이었다. 심지어 미국 장교 중 일부는 유사시 한국 본토가 모두 북한군에게 점령되는 최악의 상황까지 가정, ‘뉴 코리아(New Korea)’라는 이름의 망명 정부 수립 계획까지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이런 위기 상황 속에 예비부대로 미 해병대 1여단과 미2사단, 일부 연대급 부대가 후방에 대기하다가 전선에 구멍이 나면 바로 출동해 구멍을 메워 전선을 수습하는 것이 낙동강 방어전을 총지휘한 워커 미8군사령관의 기본 방어개념이었다.


* 자료제공 : 국방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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