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쓰는6·25전쟁] 마산위기
열차·차량 총동원 美 25사단 마산에 투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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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초기 부산항에서 하역되는 미 군용차량의 모습. 워커 장군이 마산의 위기를 수습함에 따라 군수물자를 하역하는 |
미8군사령관 워커 장군은 고심 끝에 1950년 8월 1일 25사단을 경남 지역에 투입하기로 결정했지만, 사후 처리는 첩첩산중이었다. 정면의 적과 전투를 벌이면서 철수와 이동을 하는 것은 쉬운 임무가 아니었다.
소백산맥 일대의 국군과 미군들을 낙동강선으로 조직적으로 철수시켜 새로운 방어선을 형성하는 것도 문제였지만, 미 25사단의 이동 자체도 문제였다. 일단 상주에서 방어 중이던 미 25사단이 경남 해안지역으로 철수한다는 사실이 적에게 알려진다면, 북한군이 이를 노리고 집중 공격을 감행할 위험도 있었다.
미 25사단이 이동하기 위한 주된 교통수단은 철도였다. 하지만 특단의 조치가 없는 한 이미 포화상태인 철도로 1개 사단의 병력과 장비를 통째로 움직이기에는 역부족이란 점도 문제였다. 더구나 당시 철도와 교통로에는 군수물자를 싣고 전방으로 향하는 열차와 군용차량이 가득 차 있는 상황이었다. 이를 거슬러 미 25사단이 반대 방향으로 내려오자면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의 교통 혼잡이 발생할 가능성도 높았다.
이런 위험 부담에도 불구하고 달리 선택할 방도가 없었다. 일단 국군 사단들은 미군보다 더 북쪽이나 동북쪽에 배치돼 있어 마산까지 이동하는 데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국군 사단들이 전반적으로 차량이 부족해 기동력이 떨어진다는 점도 걸림돌이었다.
이런 점을 고려한다면 그나마 미 25사단을 투입하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이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상주 방면 미 25사단 정면의 적인 북한 15사단은 전력이 약화된 상황이었다. 북한 15사단은 동락리 전투와 화령장 전투에서 국군에 연전연패를 당하고 미군 포병의 집중 사격까지 받아 전투력이 약화돼 있었다. 워커 장군은 이러 장단점을 고려한 끝에 미 25사단을 경남 해안지역에 투입할 부대로 정한 것이다.
◆ 미 25사단 마산 투입
워커 장군은 일단 철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구지역에 도착하는 모든 열차를 징발해 왜관으로 보냈다. 긴급 임무를 수행하는 일부 열차를 제외하고는 모든 열차가 미 25사단 이동에 투입됐다. 도로 사용에도 미 25사단에 우선권을 부여했다.
미 25사단의 이동 사실이 북한에 노출되지 않도록 보안에도 각별한 신경을 썼다. 또한 미 25사단이 이동할 때 미 1기병사단이 엄호를 제공해 적의 공격에 대비하도록 했다. 북한 게릴라와 좌익들의 철도 공격을 막기 위해 미 공군과 한국 경찰까지 총동원돼 이동 경로를 경비했다.
8월 1일 오후 2시 마침내 미 25사단에 철도로 경남 삼랑진으로 이동, 적의 전진을 저지하라는 명령이 하달됐다. 2일 이른 새벽 무렵에는 미 25사단에 경남 마산으로 이동하라는 수정 명령이 하달됐다. 마산이 함락될 위험성이 높아 그 후방인 삼랑진에 일단 이동할 작정이었지만, 미 24사단이 그 시간까지 버텨내는 데 성공함에 따라 목적지를 마산으로 변경한 것이다.
미 25사단 주력은 8월 2일 아침에 이동을 시작, 3일 저녁 무렵엔 목적지인 마산에 도착하는 데 성공했다. 상주에서 왜관까지는 차량으로, 왜관에서 마산까지는 철도를 이용해 명령 하달 후 36시간 만에 총 240㎞를 이동, 목적지에 도달한 것이다. 워커 장군과 미 8군 사령부는 “유사 이래 가장 극적인 기동으로 부산을 구했다”고 기뻐했다. 명령을 내리는 사람조차도 성공을 확신할 수 없었던 24사단의 마산 재배치는 그렇게 성공적으로 마무리됐다.
◆ 낙동강 전선 형성
8월 1일 소백산맥 일대의 나머지 미군과 국군 사단들도 이동을 시작했다. 새로운 방어선 형성은 단계적으로 이뤄졌다. 8월 1일부터 3일까지는 낙동강 외곽선(X선)에서 적을 지연하면서 새롭게 진지를 편성할 낙동강 방어선(Y선)에 대해 정찰 작전을 펼쳤다.
북한의 공격을 지연시키기 위해 철수와 방어선 형성의 와중에 적극적인 위력수색을 실시하기도 했다. 특히 미 27연대 1대대는 8월 2일과 3일 위력수색 중에 북한군과 두 차례나 교전하는 등 적극적인 움직임으로 미 25사단이 새로운 진지에 포진할 시간을 벌었다. 미 1기병사단도 왜관으로 철수하고, 8월 4일까지는 낙동강 위의 주요 교량을 모조리 폭파했다.
육군본부도 8월 2일 예하 국군 사단에 낙동강 방어선으로 철수할 것을 명령했다. 육군 2군단 예하 1ㆍ6사단의 철수작전은 비교적 순조로웠다. 옥에 티는 안동 일대에 포진한 육군 1군단의 철수였다. 영어로 된 철수 명령을 우리말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명령 하달과 접수가 지연된 탓에 1군단 예하 수도사단은 야간에 급박하게 철수작전을 강행하다 적지 않은 피해를 당했던 것. 이처럼 우여곡절 끝에 8월 4일 무렵에는 경남 남해안부터 마산~창녕~대구~왜관~의성 낙동리~안동 남쪽~영덕~동해안으로 이어지는 선에 새로운 방어진지 편성이 완료됐다. 낙동강 방어선, 이른바 워커 라인이 형성된 것이다.
일단 낙동강 방어선의 핵심인 낙동강은 강폭이 400~800m에 달해 강행 도하가 쉽지 않은 천연의 장애물이었다. 안동 동쪽으로 동해안까지, 창령 남지면부터 남해안까지는 강이 없었지만 험준한 산악지역을 이용해 방어선을 편성하는 것이 가능했다.
◆ 마산 위기의 파장
이렇게 워커 장군은 마산에서 촉발된 위기를 방어선 재편성과 미 25사단 투입으로 수습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파장은 만만치 않았다. 미군은 예상보다 빠르게 부산이 위협을 받으면서 반격작전 때 상륙작전부대로 사용할 예정이었던 미 2사단과 해병대 임시1여단을 낙동강 방어선에 투입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9월 중순께로 예정돼 있던 반격작전 때 투입할 2개 사단을 새롭게 마련해야 했다. 그 후보로 정해진 부대는 일본 주둔 미 7사단과 미 본토 주둔부대로 유럽 파견을 앞두고 있던 미 3사단이었다. 마산의 위기가 미군의 반격작전 등 전체적인 전쟁 수행의 기본 틀을 바꾸게 된 것이다.
한편으로, 마산 위기는 북한군과 미군에게 승패의 운명을 가르는 갈림길이기도 했다. 금강을 건너 호남을 휩쓸고, 마산으로 몰아닥친 북한 6사단의 기동은 화려했지만, 속도 면에서 실속이 없었다. 만약 북한 6사단이 호남의 항구 도시들을 일일이 점령하지 않고 바로 마산으로 직접 공격했다면, 2일 정도 더 빨리 도달하는 것도 가능했다.
미군은 북한군이 낭비한 이틀 때문에 마산을 지킬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 미 육군의 6ㆍ25 공식 전사에서는 워커 장군의 발언을 인용해 “만일 북한군 제6사단이 호남의 항구를 점령하는 우회공격을 선택하지 않고 모든 전력을 집중해 부산을 향해 쇄도해 왔다면 아마 나는 이 적을 저지하기 위한 병력을 투입할 시간적인 여유조차 갖지 못했을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북한 입장에서는 이틀을 낭비한 탓으로 승리의 기회를 스스로 걷어차 버린 것이다.
■ 워커 라인의 뿌리
낙동강 방어선, 다시 말해 워커 라인은 마산 위기로 급하게 형성된 방어선은 아니었다. 한반도의 유엔군과 국군 지상군을 지휘하게 된 워커 미 8군사령관은 이미 7월 17일부터 낙동강을 최후의 방어선으로 점찍어 두고 있었다.
아직 대전이 함락되기도 전이었지만 노련한 워커 장군은 금강방어선은 물론이고, 소백산맥의 방어선도 결국에는 뚫릴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예측하고 있었던 것이다.
낙동강 방어선은 이미 국군 수뇌부에게도 사전 통보가 돼 있었다. 7월 18일 워커 장군은 정일권 육ㆍ해ㆍ공군 총사령관 겸 육군총참모장과 함께 경비행기를 타고 왜관 상공을 비행하다 낙동강을 가리키며 “이곳이 차후의 방어지역으로 이미 선정됐다”고 설명했다.
단순히 생각으로만 진지를 정해둔 것이 아니라 사전에 진지 공사를 해둔 것도 다행이었다. 우리 정부의 협조 아래 미군은 이미 7월 하순부터 낙동강 방어선 곳곳에 교통호와 각종 진지를 마련해 두고 있었다. 8월 초 낙동강 방어선에서 혈전이 벌어질 때도 데이비스 라인을 후방에 미리 마련해 전황 악화에 대비했다.
금강에서 싸우면서 낙동강에 미리 방어선을 마련하는 식의 사전 준비는 당연한 것이면서도 막상 현실에서 실천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워커 장군은 그 혼란스러운 와중에서도 현행 작전뿐만 아니라 차후 작전을 미리 생각하고 있었고, 그처럼 노련한 지휘는 국군과 미군이 다시 반격의 발판을 마련하는 데 큰 힘이 됐다.
* 자료제공 : 국방일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