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6·25 전쟁] 낙동강전투의 서막

김병륜 기자

  • 입력: 2010.07.20 20:51:19 / 수정: 2010.07.20 20:51:19
  • 기 사

워커 장군 전선 붕괴 위기 … `방어선 축소' 결단

미 육군의 한 부대가 1950년 낙동강 방어선 형성 과정에서 이동하고 있다.           자료 사진


 “각 부대의 장교 편제 정원을 2배로 늘려야 합니다. 한 사람은 인솔을 하고, 한 사람은 뒤에서 몰아쳐야 합니다.”

 1950년 7월 하순 미25사단 24연대장이었던 존 콜리 대령의 보고 내용은 미군 지휘부를 맥 빠지게 만들었다. 사실상 병사들에 대한 통제가 제대로 되고 있지 않음을 고백한 내용이었기 때문. 6·25전쟁 참전 초반 상당수 미군 병사들은 위기가 닥치면 후퇴하려 했고, 그나마 책임감 강한 장교와 부사관들이 안간힘을 썼지만 전황을 수습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콜리 대령이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한 좌절감을 토로하던 그 무렵 소백산맥에 걸쳐 있는 전선 여러 곳에는 작은 구멍들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대전 함락 후 미군은 1기병사단과 25사단을 투입해 충북 영동과 황간에 방어선을 형성했지만 남쪽으로 밀리는 전선을 멈출 수는 없었다.
 

 ◆ 소백산맥 일대의 전투

 미24사단은 대전에서 치명적인 손실을 당한 후 23일부터 재편성에 들어갔다. 19일 충북 영동에 도착해 24사단 철수를 지원하던 미1기병사단은 23일 김천으로 점진적으로 후퇴하면서 지연전을 펼쳤다. 미25사단은 19일 경북 상주에 도착해 방어에 나서고 있었다.

 국군 1사단은 7월 23일 무렵 경북 상주와 북부와 함창 일대에서 방어전을 펼치고 있었다. 6사단은 7월 중순 이화령-문경새재 등 소백산맥의 주요 교통로를 방어하다 23일 예천, 26일 의성·안계 등으로 점차 물러서면서 끈질기게 지연전을 계속했다. 8사단도 경북 풍기·영주를 거쳐 23일부터는 안동, 26일부터는 의성에서 지연전을 펼쳤다. 그 오른쪽에는 수도사단이 8사단과 보조를 맞추고 있었다. 그나마 8사단과 수도사단은 안동 철수 과정에서 급박하고 무리한 철수 명령 탓에 적지 않은 손실을 입었다.

 당시 미군이 방어하던 경북 김천 서북방에는 북한군 2ㆍ3사단과 105전차사단, 국군이 주로 방어하는 경북 북부에는 1·8·12·13·15사단, 경북 동해안 방면에는 북한 5사단이 투입돼 있었다. 개전 초반 김포 일대에 모습을 드러냈던 북한군 6사단의 움직임이 식별되지 않았지만 누구도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 정체불명의 대부대

 이 때를 전후해 전라도와 경남 서부 지역 일대에서도 북한군의 움직임이 감지됐다. 미군 정찰기가 대전이 함락되던 7월 20일 무렵 군산에서 남하하고 있는 정체불명의 대부대를 포착한 것. 미군은 7월 21일과 22일 이 부대의 정체를 확인하려 했지만 기상 조건이 나빠 정찰기가 뜰 수 없었다.

 미군들은 전차와 장갑차로 구성된 육상 기갑수색부대 투입의 필요성을 절감했지만, 변변한 기갑 전력이 없는 상황에서 기갑수색대를 당장 투입할 여건이 되지 않았다. 23일 날이 맑아지자 미 공군 정찰기가 다시 전라도 상공을 대대적으로 뒤졌다. 미군이 20일 항공정찰로 포착했던 정체불명의 대부대는 23일에도 전주 주변에서 여전히 남하 중이었다.

 미군들은 이 부대가 북한군 4사단 중 대전전투에 참가하지 않고 남하한 일부라고 판단했다. 미8군 정보참모부는 “이 부대가 시속 3.2㎞의 속도로 계속 전진한다면 25일에는 경남 서부의 함양 안의-진주까지 진출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경남 서부 지역에는 별다른 부대가 배치돼 있지 않았기 때문에 대책이 필요했다.
 

 ◆ 상관도 미안했던 명령

 미8군 사령관은 고민했다. 당시 미8군 사령관이 운용할 수 있는 미군 사단은 아직 3개뿐이었다. 상주의 25사단과 김천의 1기병사단은 핵심지역인 경부축선을 방어하고 있어 다른 곳으로 뺄 수가 없었다. 남은 것은 24사단뿐이지만 부대 상태가 문제였다.

 7월 초 미 지상군 중 가장 먼저 한국으로 출동했던 미24사단은 대전·영동에서 혹독한 격전을 치른 탓에 전투력이 무척이나 약해졌다. 60%의 장비를 상실했고, 병력도 절반으로 줄어 재편성 중이었다. 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미8군 사령관 워커 중장은 7월 24일 말하기 미안한 듯 거북한 어조로 24사단장 처치 소장에게 말했다. “귀관의 사단에 이러한 임무를 맡기는 것을 매우 미안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현 상황에서는 다른 방도가 없네. 귀 사단은 즉시 서측방으로 이동해 진주와 김천을 잇는 선을 점령하고 군의 좌측 후방을 엄호해 주기 바라네.”

 이에 따라 25일 미24사단은 경남 서부지역으로 이동해 방어선을 형성했다. 이에 따라 25일 19연대의 주력이 진주에 진출했고, 26일에는 34연대가 거창에 배치됐다. 24사단 사령부는 합천에 자리를 잡았다. 오키나와로부터 긴급 증원된 29연대 1·3대대도 24사단에 배속돼 전투력을 보강했다.

 
 ◆ 진주 함락과 서부전선의 위기

 국군도 위기감을 느껴 25일 채병덕 소장을 영남지구 전투사령관에 임명해 경남 서부지역을 방어하도록 명령했다. 6월 30일 육군 총참모장에서 해임된 이후 의기소침해 있던 채 소장은 새로운 임무에 강한 열의를 보였다.

 미군과 국군의 재배치가 이뤄지고 있던 26일 경남 하동이 북한군에 점령당했다. 하동은 섬진강 동쪽 서부 경남의 관문이었다. 미24사단 예하 19연대장이었던 무어 대령은 하동을 공격해 북한 4사단으로 추정되는 적의 공격을 지연시키려 했다. 방어 병력이 넉넉지 않은 상황에서 수동적으로 방어하기 보다 제한적인 역습을 감행하는 것이 시간을 버는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미19연대에 배속돼 있던 미29연대 3대대는 채병덕 소장과 함께 하동으로 출동했다. 마땅히 지휘할 병력도 없던 채 소장은 미군의 길안내를 자임했다. 하지만 미군과 채 소장은 매복하고 있던 북한군의 기습 공격을 받았다. 채 소장은 전사했고, 미29연대 3대대 지휘부도 대부분 전사하거나 부상당했다. 전사자는 313명, 포로도 100명이 넘어 29연대 3대대는 전투력을 상실했다.

 하동을 통과한 북한군은 31일 미19연대가 방어하던 진주를 공격, 점령했다. 진주가 함락된 것도 심각한 문제였지만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다. 적의 정체가 그동안 생각해 왔던 것과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 북 6사단의 우회 기동

 진주가 함락되기 며칠 전인 7월 28일 무렵부터 미8군에서는 서부 경남 전방의 적 정체에 대해 약간씩 의구심을 갖기 시작했다. 미군들은 적 정체가 북한 4사단이라고 판단했지만, 그렇게 보기에는 움직임이 너무도 광범위했다. 31일에서야 미군은 경남 서부에서 전진해 오는 적 부대가 북한 4사단과 6사단, 2개 사단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이처럼 6사단 출현 사실을 확인하고서야 7월 중 군산·전주를 거쳐 남하하던 정체불명의 부대가 북한 6사단이었다는 점도 뒤늦게 깨달았다. 북한 6사단이 서해안을 따라 남하한 후 전주·정읍·광주를 거치는 코스로 크게 우회해 경남 서부지역으로 들어온 것이다.

 미군은 경악했다. 경남 서부에 북한군 1개 사단이 아니라 2개 사단이 있다면, 이미 전력이 약해진 미24사단만으로 방어하는 것은 무리였다. 더구나 4·6사단은 북한군 중에서는 나름의 정예부대였다. 특히 구 중공군 출신이 많은 6사단은 전투 경험이 경계 대상이었다.

 이미 진주까지 진입한 6사단이 마산으로 공격해 오면 부산 함락도 시간 문제였다. 당시 맥아더 유엔군사령관 겸 극동군사령관은 북한군 공격을 최대한 지연시키면서 미군의 전력을 증강시켜 9월 중순부터 대대적으로 반격에 나설 생각이었다. 하지만 반격을 하지도 못하고 부산이 함락될 수도 있는 위기가 도래한 것이다. 미8군뿐만 아니라 도쿄의 극동군사령부, 워싱턴의 합참에까지 경악과 낭패감이 퍼져 나갔다.

 워커 사령관은 8월 1일 결단을 내렸다. 경북 상주의 25사단을 빼서 경남 마산에 투입하고, 소백산맥에 걸쳐 있던 방어선을 대폭 축소해 낙동강 이동과 대구 북쪽부터 포항 북쪽의 산악지대를 연결하는 선에 부대를 재배치하는 것이었다. 문제는 과연 그것이 가능하냐는 것이었다.


* 자료제공 : 국방일보
덧글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