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쓰는6·25전쟁] 대전 전투
美 24사단 `대혈투' … 영광·치욕 교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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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사단장 딘 소장이 격파했다는 문구가 새겨진 북한군 T-34 전차의 잔해. 자료 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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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7월 대전전투 직전 미 24사단 보병이 조치원에서 박격포를 사격하고 있다. 미 24사단 등 일본에 주둔하고 |
사단장 1명 실종, 보병연대장 3명 중 전사 1명·중상 1명, 보병대대장 8명 중 전사 2명·포로 1명·중상 2명, 연대작전장교 포로 2명. 이 참담한 리스트는 1950년 7월 대전 전투를 전후한 시기 미 육군 24사단의 지휘부 손실 내역이다.
미 육군 창군 이래 사단급 부대의 고급 지휘관이 가장 큰 손실을 당한 전투라는 평가가 있을 만큼 당시 미 24사단이 입은 피해는 컸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였을까.
▶ 금강방어선의 붕괴
7월 초순부터 미 지상군이 참전하면서부터 국군과 자연스럽게 역할 분담이 이뤄졌다. 1·6·8사단 등 국군이 충청북도와 경상북도 북부 지역 일대의 소백산맥 주변의 산악지대를 맡는 동안 미 24단을 주축으로 한 미군은 경기 남부와 충남 일대의 평야지대에서 지연전을 펼치는 것이 당시 방어작전의 큰 흐름이었다.
장비와 병력 모두가 부족했던 국군이나 상대적으로 방어 정면이 넓었던 미군이나 사정이 어렵기는 마찬가지였지만 특히나 7월 지연전 상황에서 어려운 상황 속에 고전했던 쪽은 미군이었다. 7월 8일부터 12일 사이 미 24사단은 전의와 조치원에서 연달아 후퇴했다.
미국은 다음 방어 목표 지점으로 금강을 선택했다. 병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하천 장애물은 지연전에 필요한 시간을 확보해 줄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지형이었기 때문이었다. 일단 미군은 23번 국도가 통과하는 공주 정면과 1번 국도가 통과하는 연기군 금남면 대평리 두 곳에서 북한군의 도하를 차단하려 했다.
이를 위해 공주에는 미 24사단 34연대, 연기군 금남면 대평리 일대에는 미 24사단 19연대가 배치됐다. 금강을 건널 수 있는 중요한 교량은 모조리 폭파했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시간을 끌 수 있으리라는 것이 미군의 기대였다.
하지만 7월 14일 북한군 보병들이 작은 보트를 이용해 금강을 도하하면서 미군의 기대는 초반부터 무너졌다. 마침 근처에 배치돼 있던 미군 보병중대가 북한군의 도하를 목격했으나 무전기가 방전돼 상급부대로 연락할 방법이 없었다. 대평리에 배치된 미 19연대도 7월 15일 북한군의 도하를 1차 저지했지만 16일 새벽 결국 방어선이 뚫리고 말았다. 미군의 조명탄 조명이 약 20분 동안 멈춘 시간을 이용해 북한군이 도하에 성공해 버린 것이다.
▶ 대전전투
이처럼 금강방어선이 허무하게 붕괴하자 미군은 대전 갑천에서 2개 연대를 투입해 조직적인 방어전을 펼치려던 계획을 포기했다. 대신 34연대가 대전 갑천, 21연대가 마달령, 19연대가 영동에서 축차적으로 지연전을 펼치기로 했다.
대전을 방어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단지 축차적인 지연전을 펼치는 것이 목적이었으므로 대전을 방어하는 34연대는 7월 19일까지 철수하기로 정해졌다.
하지만 7월 18일 대전을 찾은 워커 미 8군사령관이 미 24사단장 딘 소장에게 “24사단이 피해를 많이 입었으니 미 1기병사단을 대신 투입하겠다”며 “1기병사단이 대전에 도착할 때까지 이틀만 더 방어해 달라”고 부탁하면서 상황이 변했다.
워커 장군의 발언 의도는 “1기병사단이 대신 투입될테니 조금만 더 버티라”는 것이었지 “20일까지 대전을 무조건 사수하라”는 취지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충직한 군인이었던 딘 소장이 워커 장군의 발언을 “20일까지 대전을 사수하라”는 뜻으로 이해하면서 대전전투 상황은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게 된다.
딘 소장은 대전에서 시간을 더 벌기 위해 19연대 2대대를 차출해 34연대에 배속하는 등 방어태세를 강화했다. 7월 19일 북한군 3사단, 4사단, 105전차사단 등 3개 사단이 공격을 시작했다.
7월 20일 새벽 3시 무렵 북한군 T-34 전차들이 유성과 대전 시가지 사이의 미 34연대 1대대 방어진지를 돌파하자, 미 1대대장은 연대본부와 통신이 두절된 상황에서 독자적으로 철수명령을 하달했다. 그 와중에 19연대 2대대도 대대장 독단으로 철수명령을 내렸다. 이에 따라 7월 20일 오전에는 유성과 대전 사이의 전방 방어선이 사실상 와해된 상태였다.
하지만 34연대 지휘부는 북한군의 위장 허위 통신으로 34연대 1대대가 갑천 일대의 진지를 여전히 고수하고 있을 것으로 오인하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됐다.
대전 시가지에 있던 24사단 지휘부도 시내에 나타난 T-34 전차를 보고도 별로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24사단장 딘 소장은 솔선수범하는 태도를 보여주기 위해 직접 신형 무기인 3.5인치 대전차로켓을 들고 북한 전차 사냥에 나섰다.
사단장이 3.5인치 대전차로켓으로 직접 북한군 T-34를 파괴하고, 부하들이 기념문구를 페인트로 적을 정도로 여유가 있었다. 통신이 두절됐지만 전방에 있는 34연대 1대대와 19연대 2대대가 보고도 없이 후퇴했으리라고는 생각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내 곳곳에 북한군이 출현하는 등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20일 오후 5시 30분 24사단장 딘 소장은 예하 34연대에 철수명령을 하달했다. 하지만 이때는 북한군이 금산과 옥천으로 빠져나가는 대전 외곽의 도로들을 모조리 차단한 상황이었다. 34연대의 철수를 보호하기 위해 21연대가 마달령에 배치돼 있었지만 산악지역 곳곳에 이미 자리를 잡은 북한군의 움직임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 와중에 대전전투에서 영웅적으로 활약했던 딘 소장이 탄 차량이 길을 잘못 들어 낙오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본대에서 낙오된 딘 소장은 부상 장병들을 돕다 경사지에서 추락, 부관 한 명 없이 적 후방에 홀로 방황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탈출을 위해 분투하던 딘 소장은 한 한국인 부역자의 신고로 북한군에 잡혀 포로가 되는 치욕까지 당했다.
▶ 전투의 명과 암
7월 초 미 지상군의 참전 이후 보름 동안 미24사단은 혈전을 치르며 시간을 벌었다. 그때 확보한 소중한 시간으로 낙동강 방어선을 형성하고, 낙동강 방어선을 발판으로 인천상륙작전이라는 반격을 실시할 수 있었으니 미 24사단의 혈투는 참으로 값진 것이었다.
하지만 미 24사단의 지연전을 영광으로 돌리기에는 상처가 너무도 컸다. 사단장이 포로가 되고 연대장·대대장 여러 명이 전사하고 실종됐다. 한국에 처음 전개될 당시 24사단의 병력은 1만5000여 명에 달했지만 대전전투 종료 후 영동에 집결한 24사단 병력은 8660명에 불과했다.
이처럼 큰 피해를 입은 이유는 애당초 미 24사단이 어렵고 위험한 임무를 맡은 탓이 컸다. 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미 24사단의 준비 부족도 문제였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군의 병력 규모와 장비를 급격하게 축소했다. 경험 많은 장병들이 대규모로 전역하면서 위관급 이하 장교와 일반 병사의 훈련 수준도 빠른 속도로 저하됐다.
6·25전쟁 발발 직전 일본에 있던 미8군의 장비 수준은 특히나 열악했다. 미 24연대의 통신 장비는 기준 수량의 60%에 불과했고, 그나마 보유량의 80%는 고장난 상태였다. 35연대 1대대의 경우 기관총의 예비 총열이 하나도 없었다. 박격포 조명탄의 50~60%는 불발탄이었다.
1961년 출간된 미 육군의 공식적인 6·25전쟁사인 ‘낙동강에서 압록강까지’는 한 전문가의 발언을 인용해, 대전전투 전후의 미군 상황에 대해 “전투에 승리하기 위해 존재하는 군대가 싸우기만 하면 패전하기 일쑤니 미군의 전통과 역사를 모독했고, 군인으로서의 자부심을 상실케 했다”고 혹평했다.
심지어 이 책은 “일본 점령 근무 중인 사단이 철저한 훈련을 하지 않았으며 전투장비의 보충과 정비를 게을리했으며 실전적인 전투훈련을 하지 않았다”며 “(미군들의 상태가) 비소를 마신 파리와 같았다”는 극언까지 남겼다.
1950년 6·25전쟁은 45년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지 겨우 5년이 지나 발발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은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건설했다. 세계 최강의 군대였던 미군은 불과 5년 만에 “훈련 부족”과 “장비부족”이 문제가 돼 “미군의 전통을 모독”하는 수준으로까지 전락한 것이다.
아무리 세계 일류의 강한 군대라 할지라도 평시에 잠시라도 방심하면 전시에 위기에 빠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무서운 교훈이 아닐 수 없다.
* 자료제공 : 국방일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