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쓰는6·25전쟁] 미군의 전개
미군, 적 경시하다 악전고투 끝 `쓴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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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7월 미 육군24사단 소속 포병들이 금강 방어선에서 곡사포 사격을 준비하고 있다. 자료사진 |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이 6월 30일 미 지상군 투입을 결정하자 극동군사령관 맥아더 육군 원수는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미 육군 8군사령관인 워커 장군을 통해 미24사단에 출동명령을 하달했다. 또 미 육군 25사단 27연대를 주축으로 한 1개 연대전투단을 출동 준비시키도록 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미 극동사는 전쟁 상황을 다소 안이하게 판단하고 있었다. 당시 극동사가 만들었던 작전계획 ‘블루하트’는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미 육군 1개 사단과 1개 연대급 전투단을 한반도로 투입, 차령산맥이나 소백산맥 적당한 선에서 지연전을 펼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일단 북한군의 공격 속도가 둔화되면 7월 22일께 인천에 미 육군 1기병사단과 해병대를 투입해 적 후방에 상륙작전을 감행해 전쟁을 끝내겠다는 것이 블루하트 작전계획의 핵심이었다.
다만 미군이 반격의 발판을 마련하기도 전에 너무 후방으로 밀려버리는 것을 피하기 위해 가급적 1개 대대라도 먼저 출동시키려 했다. 그래서 선정된 것이 2사단 21연대 1대대였다. 24사단장 딘 소장은 사단에서 가장 정예부대로 평가가 높던 21연대 1대대를 선발대로 결정했다.
21연대 1대대에 105㎜ 곡사포 1개 포대를 증강시켜 스미스 특수임무부대(Smith TF)를 편성했다. 스미스라는 이름은 대대장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었고, 특수임무부대(TF)라는 명칭은 보병에 기갑ㆍ포병부대를 배속해 새롭게 전투 임무에 맞는 부대를 편성했다는 뜻일 뿐 특수부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스미스 TF는 원래 항공편으로 수원으로 바로 투입하려 했지만, 부산에 도착한 후 열차로 상경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미군이 실제로는 국군이 장악하고 있던 수원을 이미 북한군에게 공격당한 지역으로 착각했기 때문이다.
◆ 죽미령 전투
선발대로 정해진 스미스 TF는 7월 2일 대전에 도착했으나, 오산 북방 4㎞의 죽미령에 방어진지를 편성한 것은 7월 5일이었다. 몇 차례의 진지 변경으로 시간을 소비했기 때문이다. 당시 미군은 북한군을 보잘것없는 장비로 무장하고 훈련도 되지 않은 전근대적인 군대로 오판하고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세계 최강의 미군이 나타나기만 해도 북한군은 철수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사람도 많았다.
하지만 4사단 16연대와 18연대 등 2개 보병연대와 105전차사단 107연대 소속 T-34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은 6시간 15분 동안의 혈전 끝에 스미스 TF의 진지를 유린했다. 스미스 TF는 북한군 전차 4대를 격파하고, 2대를 반파시키는 전과를 거뒀지만 절대적인 병력 규모의 열세를 극복할 수 없었다.
죽미령 전투를 전후해 미 육군 각급 부대가 차례로 한반도로 출동하기 시작했다. 7월 1일 사세보에서 승선한 미 2사단 34연대는 2일 밤 부산에 상륙해 열차 승차를 시작했다. 그러나 7월 4일 아침이 돼서야 미 34연대 1대대가 열차로 북상을 개시했고 연대 주력은 저녁 때에 부산을 출발할 수 있을 지경이었다.
더구나 34연대가 일본에서 한국으로 올 때 평시 주둔지용 물자를 너무 많이 갖고 와서 전시 임무에 맞는 물자를 선별하는 작업도 지연됐다. 한국도 전쟁 준비가 안된 상태였지만, 미군도 별다를 것이 없었던 것.
◆ 1차 증원요청
미군이 죽미령에서 처음으로 북한군과 전투를 시작하던 무렵 맥아더 원수는 워싱턴의 합참 연락장교를 시켜 미 2보병사단, 미 82공수사단의 1개 연대전투단, 1개 해병연대, 해병 공병부대, LST 등 상륙전 요원의 증원부대를 요청했다.
블루하트 계획을 처음 세웠던 때의 판단과 달리 북한군 전력이 실제로 더 강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맥아더는 미 25사단의 1개 연대 외에 나머지 2개 연대까지 추가로 한반도에 투입시키고, 인천상륙작전에 사용할 1기병사단도 방어전에 투입하기로 생각을 바꿨다.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미 육군7사단은 일본 자체 방위를 위해 일본에 남겨 둬야 하기 때문에 인천상륙작전에 필요한 부대는 미 본토에서 추가로 증원받아야 한다는 것이 맥아더의 판단이었다.
이와 함께 극동사는 북한군 전력의 핵심은 T-34 전차라고 판단하고 7월 3일 개발이 막 끝난 3.5인치 로켓포의 한반도 배치를 워싱턴에 요청했다. 이와 함께 일본 주둔 미 8군이 보유하고 있는 M-24 경전차로는 T-34 전차에 상대할 수 없다고 생각해 보다 성능이 강한 중전차를 보유한 12개 전차 중대 증원을 요청했다.
이 같은 맥아더 원수의 요구에 브래들리 합참의장은 의구심을 표명했다. 맥아더의 증원 요청이 제2차 세계대전 스타일의 상륙전에 포인트가 맞춰져 있었기 때문이다. 브래들리 합참의장은 마침 “핵무기가 개발된 만큼 제2차 세계대전식의 상륙작전을 할 수 있는 시대는 끝났다”고 주장해 왔기 때문에 상륙전에 포인트를 둔 맥아더 원수의 증원 요구를 그대로 수용하기는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 같은 브래들리 합참의장의 판단에 따라 7월 6일 미 합참은 맥아더 원수에게 증원 병력을 요청한 취지와 필요한 병력 규모를 다시 질문했다. 이 같은 질문에 맥아더가 지휘하는 미 극동사는 7월 7일 추가로 병력이 더 필요하다는 취지의 답변을 했다.
완전히 편성된 4~5개 보병사단, 1개 공수연대, 3개 중전차대대, 포병과 근무부대를 포함한 3개 대대 전투단을 요구했다. 당시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미 육군 사단은 2개 보병연대로만 편성된 감편 사단이었으므로 이 같은 요구는 주일미군만으로는 한반도의 상황에 대응할 수 없다는 입장을 재확인한 것이었다.
◆ 계속되는 증원요청
스미스 TF에 뒤이어 미 24사단 34연대가 7월 6일부터 8일까지 평택에서 천안에 이르는 국도 축선에서 방어전을 폈으나 이 또한 실패했다. 더구나 천안전투에서 새로 부임한 34연대장 마틴 대령과 34연대 3대대 작전장교 시거 소령이 전사했다. 34연대 작전과장 딘 소령도 포로로 잡히는 등 34연대는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다.
미 육군의 연대급 부대로도 북한군의 공격을 지연시킬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지자 맥아더 원수를 비롯한 극동사의 지휘부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이에 따라 7월 9일 맥아더 원수는 미 합참에 세 번째의 증원을 요청했다.
맥아더 원수는 “북한군의 기갑장비는 매우 우수해 과거의 독일군과 같은 능력을 갖고 있다”며 “북한 보병도 자질이 우수하다”고 재평가를 내렸다. 소련식과 중공군식을 혼합한 북한군의 전투 방식도 과소평가할 수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이에 따라 맥아더는 지금까지 요구한 병력 외에 추가적인 4개 사단을 포함한 1개 야전군이 필요하다고 요청했다. 이 같은 맥아더의 요구에 이번에는 워싱턴이 충격을 받았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병력 규모를 감축했기 때문에 막상 미군에는 병력 여유가 많지 않았다. 사실상 유럽 지역 주둔 병력까지 빼내야 맥아더가 요구하는 병력을 충족할 수 있었다.
미 합참은 “병력도 없고, 유럽 주둔 병력을 손댈 수 없으며, 수송선도 부족해 수송 능력 측면에서도 수용할 수 없다”며 맥아더의 요구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에 맥아더는 유럽만 생각하고, 아시아를 경시하는 오판이라고 생각했다. 개전 초부터 맥아더의 판단과 워싱턴의 미군 수뇌부의 판단은 계속 엇나갔고 이 같은 균열은 훗날 더욱 큰 논란의 출발점이 됐다.
◆ 미군의 배치와 북한군의 대응
미 24사단의 잔여부대는 7월 4일까지 부산에 모두 도착했다. 추가 증원 요구에 따라 한반도에 파병이 결정된 25사단은 7월 10일과 15일 사이 부산에 도착했다. 하지만 이렇게 미군이 도착하는 중에도 방어선은 차례로 붕괴됐다. 7월 8일부터 12일까지는 전의와 조치원이 함락됐다. 17일에는 대전이 북한군에 포위 공격을 받았다. 비슷한 시기 북한군 일부 병력은 소백산맥을 넘어 경북 일대로까지 진입했다.
반대로 미 지상군의 참전은 북한군에게는 충격적이었다. 죽미령전투부터 북한군이 연이어 승리하기는 했으나 미 지상군이 이렇게 신속하게 개입하는 것은 그들의 예상 밖이었다. 북한군은 예비 전력을 확충해 해안 방어를 강화하고 공격 속도를 높여 미군이 전개를 마치기 전에 전쟁을 끝내야 한다는 위기감을 느끼게 됐다.
* 자료제공 : 국방일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