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6·25 전쟁] 위기의 서부전선
북한군 6사단, 열차 타고 개성 시내 진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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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5전쟁 개전 초기 북한군의 남침 행렬. |
6월 25일 새벽 6시 개성 시내에 자리 잡고 있던 개성역은 그야말로 ‘야단법석에 난리통’이었다. 새벽 4시부터 전방에서 들려오는 포탄 소리를 듣고 일찌감치 피란길에 나선 주민들, 휴가나 외출을 중지하고 복귀하는 1사단 12연대 소속 일부 병사들로 인해 역 구내는 어수선하기 짝이 없었다.
그 순간 한 열차가 개성역 구내로 천천히 진입했다. 아무런 경계감 없이 열차로 접근하는 민간인과 군인들은 열차에서 쏟아져 나온 갈색 군복을 보고 기겁했다. 열차 속에서 쏟아져 나온 것은 북한군 6사단 소속 병사들이었기 때문.
남북을 연결하는 철도는 이미 차단돼 있었으나 북한군은 야간에 비밀리에 연결, 열차를 타고 개성 시내에 돌입하는 한바탕 쇼를 연출한 것이다. 이미 1사단 12연대 전방 전역에 걸쳐 북한군의 공격이 가해지고 있는 가운데 개성 시내에까지 북한군이 기습적으로 나타나자 개성 일대의 상황은 대혼돈 속으로 빠져들었다.
개성을 공격한 북한군 6사단은 주로 구 중공군 출신들로 편성된 사단이었다. “북한 6사단이 열차를 타고 전선을 돌파하는 기묘한 발상을 해낸 것은 특이한 전술을 자주 구사하는 중공군 스타일 같다”는 평가가 나온 것도 그 때문이다.
○고지군 피탈
국군1사단 12연대 2대대가 방어하고 있던 개성 북방의 전선은 이미 개전 초반 송악산 남쪽의 365고지와 470고지가 북한군에 점령되면서 일찌감치 위기 속으로 빠져들었다. ‘육탄 10용사’의 신화가 서려 있는 송악산과 그 주변 고지군은 개성 시내를 내려다볼 수 있는 핵심 요지였다.
송악산 남쪽 470고지에 배치돼 있던 국군1사단 12연대 2대대 6중대 병력은 개전 시작과 함께 집중적인 포격을 받은 데다 정면과 동쪽에서 동시 공격을 받았다. 통신은 단절되고 안개로 시야까지 제한되고 중대장마저 전사하자 6중대는 더 이상 조직적인 저항을 할 수 없었다.
이런 식으로 개성 북방의 고지군이 개전 초반에 북한에 점령되자 개성 시내의 움직임은 완전히 북한에 노출됐다. 12연대 2대대 소속의 다른 중대들도 압도적인 병력과 장비로 밀어붙이는 북한군의 공세에 밀려 조직적인 전투가 불가능했다. 북한군이 개성 시내에 포병 사격을 가하면서 시내 이곳저곳에서 불길과 함께 연기가 치솟았다. 개성 시내가 북한군에게 완전히 함락된 것은 6월 25일 오전 9시 30분쯤이었다.
황해도 연안에 배치돼 있던 국군1사단 12연대 3대대의 상황도 고약하긴 마찬가지였다. 개전과 함께 병력이 배치된 초소는 포연에 휩싸여 버렸다. 예성강 강변과 백천역 인근에 배치돼 있던 12연대 3대대 9중대의 유일한 수송차량은 새벽 5시 20분에 떨어진 포탄으로 파괴됐다.
여기저기서 마구 떨어지는 포탄으로 극도로 신경이 날카로워진 12연대 3대대 9중대장 조진석 중위는 그 무렵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9중대 본부로부터 200m 정도 떨어진 백천경찰서에서 온 전화였다. “인민군이 우리를 해방시키러 왔으니 경찰과 국군은 모두 함께 항복하자”는 황당한 내용이었다.
평소 자주 통화하던 백천경찰서장의 목소리와 다른 것을 알게 된 조 중위는 “당신 누구냐”고 되물었다. 상대방은 “과거 경비대에 있었던 사람” 운운하며 횡설수설했다. 이미 백천경찰서를 점령한 북한군이 아군을 상대로 심리전을 걸어온 것이었다.
포위당하기 직전의 상황임을 직감한 조 중위는 대대에 보고하고 지시를 받으려 했으나 유·무선 통신은 이미 모두 단절됐다. 청단읍을 방어 중이던 3대대 10중대와 연안읍을 방어 중이던 3대대 11중대도 개전 초반 집중적인 공격을 받고 일찌감치 조직적인 전투가 불가능해졌다. 연대본부와 연락이 끊긴 상황에서 3대대는 가급적 주민들의 철수 시간을 벌어 주기 위해 지연전을 고려했으나 부대의 철수 자체가 불투명한 위기 상황 속으로 빠져들었다.
○ 연대 본부의 상황
개성 남쪽 강릉동에 자리 잡고 있던 12연대 본부와 1대대의 상황도 암담했다. 1대대 병력의 대부분은 휴가와 외출 중이었기 때문이다. 개성 시내의 사택에 있던 12연대장 전성호 대령은 부대로 복귀한 후 잔류 병력을 모아 하각동의 구릉에 배치했다. 급하게 편성된 병력은 남하하는 북한군 기마대를 맞아 1시간가량의 전투 끝에 격퇴시켰지만 2ㆍ3대대가 이미 붕괴된 상황에서 개성 지구의 방어는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부하들은 전성호 대령에게 “우선 연대장님 가족과 군인 가족들을 피신시키도록 차량을 냅시다”라고 건의했다. 하지만 중국에서 무장독립투쟁을 하다 귀국, 국군에 몸 담은 전 대령은 “개성 시민의 피란 대책도 세우지 못했는데 부족한 차량을 동원해 가족들을 피신시킬 권한은 없다”는 말로 부하들의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연락이 끊긴 12연대 2대대와 3대대를 걱정하며 전방 상황을 관찰하던 전성호 연대장은 개성 고남리에서 2대대 병력들과 극적으로 만났다. 마침 2대대장 한순화 소령이 병력들을 수습해 후방으로 철수하다 연대 지휘부와 마주친 것.
현장에서 급하게 대책을 논의하던 12연대장과 2대대장은 역습을 결정했다. 철수하는 병력을 모아 개성 시내를 향해 기습적인 공격을 가하자는 것이었다.
2대대장은 일부 수습된 병력으로 특공대를 통합 지휘해 이날 오전 10시 개성 남대문으로 돌입했다. 특공대는 때마침 남하를 준비하던 북한군 행렬에 기습 사격을 퍼부을 수 있었지만 워낙 전력 차가 심한 상황에서 공격은 오래 지속될 수 없었다. 결국 2대대 잔여병력으로 편성된 특공대도 다시 후방으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고난의 철수 작전
2대대의 역습이 실패하자 12연대장 전성호 대령은 마침내 임진강을 건너 문산으로 철수할 것을 명령했다. 후송이 불가능한 탄약이 적의 손에 넘어가지 않도록 군수주임으로 하여금 연대 탄약고를 폭파시키도록 명령했다. 12연대 본부와 1대대 장병들은 연대 탄약고가 폭발하는 소리를 뒤로하고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개성 시내 방향으로 역습을 시도했던 2대대는 임진강 쪽으로 갈 여유도 없었다. 임진강 철교 쪽으로 이미 북한군이 접근해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2대대는 적이 이용하지 못하도록 수류탄으로 박격포 포신을 파괴하고 기관총을 완전 분해한 뒤 도로변에 파묻었다. 2대대 병력이 해안가인 영정포에 도착한 것은 6월 25일 오후 5시. 건너편의 김포로 도하에 성공한 것은 이날 저녁 7시의 일이었다.
3대대의 철수 상황도 혹독했다. 대대본부는 같은 날 오후 1시 석포에서 2척의 어선으로 강화도로 철수했다. 9중대도 백천 남쪽을 거쳐 석포까지 철수한 다음 어선으로 강화도로 철수했다. 11중대는 남쪽 해변에 집결해 대형 목선 1척으로 교동도로 철수했다. 그나마 탑승 공간이 충분하지 못해 일부 병력은 저녁 7시 55분에 용매도를 거쳐 인천으로 철수했다. 거의 중대 단위로 감행된 처절한 철수 행렬이었다.
■ 12연대가 고전한 이유 -1개 연대가 63km 정면 방어
사실 1사단 12연대는 애시당초 불리한 점이 너무 많았다. 94km에 달하는 1사단의 방어정면 중 12연대가 담당한 정면이 무려 63km에 달했다. 1개 연대가 사단 방어 정면의 ‘3분의 2’를 담당한 셈이다.
개전 당시 12연대는 3대대를 예성강 서쪽의 황해도 연안군에 배치하고, 2대대로 하여금 개성 북방을 담당하게 했다. 1대대는 후방 개성 강릉동에 배치돼 있었다. 3대대의 방어 정면은 약 50km, 2대대의 방어 정면도 약 20km에 달했으니 사단으로도 방어하기 힘든 지역을 대대급 부대들이 지키고 있었던 셈이다.
그나마 청단 서쪽 11㎞의 외곽을 벗어난 지역은 아예 병력이 전혀 배치되지 않은 경비상의 공백지대였다.주요 교통로와 주변 일대를 감시하기에 용이한 주요 감제고지에만 병력이 점점이 배치돼 있었을 뿐이므로 지금의 삼엄한 전방 방어 분위기와는 전혀 다른 상황이었다. 적이 대규모 병력으로 조직적인 공격을 감행한다면 방어하는 것 자체가 애당초 불가능한 지역이었다.
1사단도 이런 점을 감안해 12연대는 유사시 후방으로 철수한다는 것을 전제하고 작전계획을 짜놓고 있었다. 결국 1사단 12연대에 남은 유일한 임무는 무사히 축차적으로 철수하는 길뿐이었다. 이처럼 6ㆍ25 개전 초반 패전의 결과만을 놓고 보자면 아쉬운 점이 많지만 개별 전투를 하나하나 따져 보면 불가항력적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 자료제공 : 국방일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