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쓰는6·25전쟁] 기습
'새벽 4시 전쟁 발발 … 오전 10시에 전면전 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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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은 1950년 6월 25일 38선 전역에 걸쳐 남침 공격을 시작했다. 사진은 전쟁 중 미1기병사단이 세운 38선 안내 표지. |
“떨어집니다. 막 떨어집니다.”
6월 25일 새벽 4시 30분에서 몇 분이나 더 지났을까. 육군 7사단 정보처에서 북한의 기습을 알리는 제1보가 육본 정보국으로 올라왔다. 숨을 헐떡이며 전해 온 보고 내용은 북한군의 122㎜ 곡사포 사격이 시작됐다는 내용이었다. 과거 38선 충돌 때 들었던 북한군 박격포 소리와는 전혀 다른 122㎜ 곡사포탄의 폭발음 때문에 전방 장병들은 소리만으로 평소와는 다른 상황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이미 그 시간 제일 서북쪽 옹진반도에 자리 잡고 있던 육본 직속 17연대부터 경기도 개성과 문산에 자리 잡고 있던 1사단, 경기도 동두천의 7사단, 강원도 춘천의 6사단, 강원도 주문진의 8사단의 전방부대들도 북한군의 맹렬한 공격 준비사격을 받고 있었다.
육본 정보국이 전쟁의 소동 속으로 빨려들어 간 바로 그 시간 육본 작전국도 충격 속으로 빠져들었다. 이날 육본 상황실 당직이었던 조병운 대위는 “강릉 북쪽 38선 지역과 춘천의 수리봉, 옹진의 까치봉에서 상황이 발생했다는 보고가 거의 동시에 전해져 큰 충격을 받았다”고 증언, 당시 작전군의 분위기를 전한다.
육본 정보국의 일직장교로 근무 중이던 김종필 중위는 즉시 작전국으로 뛰어 올라가 일직사령에게 전군에 비상을 걸 것을 건의했다. 하지만 일직사령은 펄쩍 뛰며 “그럴 권한이 없다”고 했다. 결국 작전국 요원들이 채병덕 총참모장에게 정식 보고를 통해 결심을 받기 위해 연락을 취하는 동안 정보국 요원들도 장도영 정보국장에게 전방 상황에 대한 보고를 올리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이런 보고에 따라 장도영 정보국장이 육본 정보국에 나타난 것은 새벽 5시 40분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작전국장에게는 연락이 닿지 않았다. 인사ㆍ군수국장과도 쉽사리 통화가 연결되지 않았다. 작전국에서 겨우 통화가 돼 육본에 도착한 주요 고급 장교는 새벽 5시 30분에 나타난 작전국 차장 이치업 대령뿐이었다.
벌집 쑤셔놓은 듯한 육본의 분위기에 한번 놀란 이치업 대령은 작전국 상황판을 보고 두번 경악했다. 상황판은 전방 여기저기에서 동시에 전투가 벌어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심상치 않은 상황이라 판단돼 비상을 발령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럴 권한이 없는 것이 문제였다. 원래 작전명령을 하달하는 것은 채병덕 총참모장, 김백일 참모부장, 장창국 작전국장의 권한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속절없이 흘러가자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다고 판단한 이치업 작전국 차장은 독단으로 군에 비상을 걸고 ‘작전명령 1호’를 하달했다.
이에 앞선 새벽 4시 20분 6사단 7연대장인 임부택 중령은 채 총참모장 공관에 전화를 걸어 부관 나엄광 중위에게 전방에서 교전 중이라는 사실을 알렸다. 부관 나중위는 총참모장 부인 백경화 여사에게 보고를 전해 달라고 부탁했지만 채 총참모장은 뚜렷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연이어 작전국의 보고가 전달되고 정보국의 김종필 중위가 새벽 6시 무렵 총장 공관에 직접 찾아오자 그제서야 채 총참모장도 전방 상황이 평소와는 다르다는 것을 인식했다. “던군(全軍)에 비상하라, 각 국당(局長)을 불러라.” 평양이 고향이었던 채 총참모장은 즉시 구개음화가 없는 투박한 평안도 사투리로 비상령 발동을 지시하고 육본 국장들에 대한 소집 지시를 하달했다. 그러고는 신성모 국방부 장관 공관에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국방부 장관 공관에는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외국 생활에 경험이 있던 신성모 장관은 평소 주말이면 면회나 전화도 사절하는 등 프라이버시를 중시했다. 어쩔 수 없이 채 총참모장은 국방부 장관 비서실장인 신동우 공군 중령에게 연락해 차량으로 서울 마포에 있던 장관 공관으로 직접 찾아갈 수밖에 없었다.
국방부 장관 공관을 경비하던 헌병들은 사전 연락도 없던 차량이 들어오려 하자 통과를 막으며 제지했다. 긴급 상황임을 알리는 채 총참모장 일행들의 고함 소리를 듣고서야 헌병들은 차량의 통과를 허가했다. 가운에 가까운 가벼운 옷차림으로 채 총참모장의 보고를 들은 신성모 국방부 장관은 경악했다. 그때가 오전 7시였다. 구두 보고를 통해 비상 동원령에 대한 재가를 얻은 채 총참모장은 육군본부로 복귀해 지휘를 시작했다. 이때는 이미 오전 7시를 넘어섰을 때였다.
오전 8시, 채 총참모장은 김백일 참모부장과 함께 2ㆍ3ㆍ5사단 등 후방 3개 사단의 전방 출동을 결정했다. 동시에 수도경비사(현 수도기계화보병사단) 예하의 3개 연대에 출동 대기를 명령했다. 가시적인 병력 이동 조치를 취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장창국 작전국장이 육본에 도착한 것은 오전 10시 무렵이었다. 마침 서대문쪽으로 이사를 갔던 장 국장의 집에 공용전화는커녕 사설전화도 미처 가설되지 않았던 것이 화근이었다. 장 국장의 집을 아는 사람을 찾지 못해 작전국에서 소동이 벌어지던 찰나 천만다행으로 장 국장에게도 연락이 닿았다. 마침 차량을 타고 ‘비상소집’이라는 가두방송을 하던 헌병들이 집 앞을 지나가면서 장 국장도 상황 발생을 인지하게 된 것.
장 국장이 육본에 도착한 후 가장 먼저 맞닥뜨린 일은 전화 통화였다. 장 국장 책상 앞에 놓여 있던 15회선의 전화기는 육군의 사단을 비롯한 주요 부대와 직통으로 연결되는 전화기였다. 평소에는 편리하기 그지없는 전화기였지만 전쟁 상황에는 무지 불편한 존재로 전락했다. 별도의 야전군사령부나 군단이 없던 시절이라 각 사단장은 일제히 장 국장에게 전화를 걸어 직접 통화하기를 원했다. 15개의 수화기를 교대로 집어들며 전화 통화의 홍수로 빠져든 장 국장은 전쟁 상황을 체계적으로 판단할 시간도 여유도 없었다.
장 국장은 1960년대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에서 이뤄진 공식 증언을 통해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각 부대로부터의 상황보고는 산발적으로, 또는 긴급히 들어왔으나 정보와 작전 두 계통으로 왔기 때문에 상황 파악에 어려움이 많았다. 당시 체계가 정보를 교환하고 상황을 판단할 수 있는 것이 못 되고 합동회의도 없었으므로 부득이 개념적으로 상황을 파악하면서 우왕좌왕했던 것이다.”
장 국장이 전화통을 붙들고 우왕좌왕하면서 씨름하고 있는 동안 채 총참모장은 경기도 전방 지역을 순시 중이었다. 경기도 수색에 있던 1사단 사령부을 방문하고 예비 연대인 1사단 11연대의 전방 출동을 격려한 후 오전 10시 무렵 의정부의 7사단 사령부를 방문한 채 총참모장은 큰 충격을 받았다. 어려움 속에서도 나름대로 선방하고 있었던 1사단과 달리 7사단 전방의 포천은 이미 거의 전선이 붕괴될 조짐을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제야 채 총참모장은 생각보다 더 심각한 전면적인 전쟁이고 위기라는 점을 깨닫기 시작했다.
평소보다 규모가 큰 대규모 충돌이라고 생각했을 뿐 미처 전쟁이라는 단어를 떠올리지 못한 육본의 주요 장교들도 같은 시간 이것이 평소보다 규모가 큰 충돌 정도의 사건이 아니라 전면적인 전쟁이라는 점을 실감하기 시작했다. ‘막 떨어지는 포탄’과 함께 전쟁이 시작된 지 이미 6시간이 경과한 후였다. 전쟁이 시작된 것은 새벽 4시였지만 이것이 전쟁이라는 것을 우리가 제대로 인식한 것은 오전 10시였다. 실제로나 심리적인 측면에서나 그야말로 북한군의 완전한 기습이었다.
* 자료제공 : 국방일보


